'2012/06'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6.29 정치중립
  2. 2012.06.25 내가 트위터를 하는 이유
  3. 2012.06.06 맑스는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할까?

정치중립

내 생각 2012. 6. 29. 03:47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한국화학공학회라는 단체에서 한 말이다.

 

이 단체에서 이런 말을 꺼낸 사연이 있다.

지난 4월 이 한국화학공학회라는 곳에서 제주 서귀포 학술강연에 김광섭이라는 70대 재미공학박사를 초청하였다.

김박사는 강연을 위하여 천안함 침몰사건-흡착물과 1번 글씨에 근거한 어뢰설을 검증하기 위한 버블의 온도 계산이라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강연이 취소가 되었고 김박사는 한국화학공학회로부터 한국의 특수한 실정 때문에 강연을 취소한다는 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화공학회가 김광섭 박사에게 보낸 메일에는 화공학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는데 (김 박사의) 논문은 금년에 두 번 있는 선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취소 사유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참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연이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학자의 논문발표와 강연의 자유를 제한한다니…?

말이 안돼도 너무 말이 안된다.

물론 이 이야기의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정권의 외압 가능성도 농후하고 딴은 권력의 눈치를 보는 학회측의 곤란한 속사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정치적 중립이란 이데올로기에 대해선 몇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정치와 우리 삶에 대한 우리사회의 오래되고 잘못된 인식과 가치관이 투영되어있기 때문이다.

 

먼저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우리 보통사람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흔히 정치하면 TV와 방송에서 여당과 야당 국회의원들의 몸싸움이 생각나고 그래서 그들에게 욕지거리는 할지언정 우리 삶과는 별개의 이야기로 넘겨버리기 쉽다.

그러나 정치란 우리네 삶에서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우리는 원유가 등락이 반영도 안되는 기름값에 누굴 위해 걷는 건지도 모르는 간접세를 합친 가격에 기름을 산다.

그리고 그 비싼 기름 넣은 자동차를 탄다.

우리는 지금 응당 받을 수 있는 스마트폰의 무료 서비스를 이동통신사들의 독과점 권력 때문에 제대로 쓰지도 못한다.

우리는 누구나 의료보험카드가 있다.

그러나 암, 백혈병, 치매 등을 염려하여 우리는 TV 속 수많은 보험상품 중 하나를 또 산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 중 누군가를 의료사고로 잃으면 변변한 법적 보호 하나 없이 판사, 변호사 앞에서 의사의 과실을 증명하기 위해 의료전문인과 길고 외로운 싸움을 한다.

어느 날에는 십여 년이 넘도록 다닌 회사에서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고, 하여 노동위원회에 이의제기를 했는데도, 그리고 법정에서 승소했는데도 재벌의 엄청난 권력 앞에서 억울한 눈물을 지으며 쫓겨 난다.

그리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땀 흘려 지은 농사를 국가공익이란 이름의 토건행정 때문에 하루아침에 흙더미에 파묻히는 걸 눈뜨고 지켜봐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돈이 없고 자기 집과 땅이 없다는 이유로 피땀으로 일군 삶의 경륜과 노력의 소산을 빼앗긴 채 살던 집과 일하던 가게에서 강제로 쫓겨난다.

그리고 우리 중 또 다른 사람들은 좀 더 평등한 삶과 의로운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경찰과 검찰에게 얻어 맞거나 체포 당하고 징역을 살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한 개인의 나홀로 삶이 아니라 사회적 고리와 맞물린 삶이다.

우리 삶의 많은 것이 사회의 공론의 장으로 나와 논의되고 합의되어 개선해야 할 대상이다.

즉 우리 삶의 문제가 정치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를 바라보는 우리 보통사람들의 시선은 어떠한가?

국회의원 금뱃지는 돈많고 힘 센 사람이 다는 것.

정치하는 놈들이 제일 잘하는 건 몸싸움과 당파싸움.

정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는 것.

고작 이 정도 수준 아닌가?

 

그러나 정치는 우리 삶을 다루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돈많고 힘 센 사람이 아니라 의롭고 정직한 사람이 국회의원 금뱃지를 달아야 한다.

그러니 더 치열하고 가열차게 싸워서 사회의 최대유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정치를 위해서 우리 보통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과 비판과 참여의 시선으로 정치판을 바라보아야 한다.

 

한국화학공학회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건의 발단은 김광섭 박사의 논문 내용이었다.

수십 명의 젊은 군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천안함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정부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어뢰격침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젊은 목숨들을 빼앗은 살인자가 북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의혹과 문제제기가 있었다.

정부는 대답을 회피했다.

만약 정부의 발표가 거짓말이라면 누군가 젊은 군인들의 목숨을 빼앗고도 그 책임을 엉뚱한 곳으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여전히 권력을 쥔 채 또 다른 젊은 군인들의 목숨을 무책임하게 빼앗을지도 모른다.

 

김광섭 박사의 학술강연은 정치적으로 정의로운 것이었다.

아무리 나름의 속사정이 있을는지 모를 일이지만 화공학회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변명은 정치적으로 부끄러운 짓이었다.

 

정치적 중립이라고?

 

개소리하지 마라.’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하고 수십 개의 언론사가 비판을 했어야 옳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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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트위터를 하는 이유




 

내가 트위터를 언제 처음 시작했는지, 왜 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억은 없다.

다만 이것 저것 지난 흔적을 뒤져보니 한 2년쯤 전에 처음 트위터에 가입을 했던 것 같다.

생활비로 꾸기 시작한 빚이 점점 늘어가고 어떻게 해볼 도리는 막막해서 답답하고 괴로웠던 심정을 아무에게나 쉽게 터놓기도 어려워 나 혼자란 외론 감정마저 느끼고 있던 때였다.

그 때 박중훈 등 연예인도 화제가 되면서 SNS라는 것이 붐처럼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인터넷만 있으면 사회소통망을 구성할 수 있다…? 누군가와 대화가 필요한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사회소통 수단이 될 수 있겠다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작정 가입한 트위터 세상은 내게 너무 낯설기만 했다. 뭔가 함께 나눌 관심사나 대화거리가 내겐 전혀 없는 것 같고 팔로잉’ ‘리트윗’ ‘해시태그등의 생경한 용어들

나는 금세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트위터를 잊고 살았다. 내 생활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나마 교회 가족들의 헌금 덕분에 몇 달을 버티며 구직활동을 했지만 직장은 얻지도 못하고 손에 쥔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빚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눈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죽고만 싶었다.

채무 독촉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두려움과 회한의 연속이었고 죽고만 싶었다.

진짜 죽을 생각도 했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죽는 데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고 죽는다고 생각하니 죽어 떠나기엔 너무 아까운 세상이고 내 자살이 억울해졌다.

비록 입에 풀칠만하고서 목숨을 연명하더라도 살고 싶어졌다.

파산의 방도를 찾아 보았다.

쉽지 않았고 친구들의 돈을 또 한번 유용하는 나쁜 짓도 저질러야 했다.

 

파산신청서류를 법원에 접수하고도 채무 독촉전화는 멈추지 않았다.

갚을 수 없는 형편이고 그래서 파산신청을 했다는 사정 얘기도 소용없었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채권사의 태도는 냉정하고 매서웠다.

잔인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언제까지 무조건 갚으라는 둥, 집을 방문하겠다는 둥의 이야기는

드라마에서 봐왔던 사채업 폭력배들의 행패를 상상하게 했고 날마다 그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어떻게 견디나? 어찌해야할까?

날마다 하루의 대부분을 이 빚독촉에 대한 시름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한 인터넷 문서 하나가 있었다.

불법채권추심 대응 10대 수칙

채권추심에도 지켜야 할 법적 기준이 있고 불법추심행위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원에 고발할 수 있다는 내용의 문서였다.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채무독촉의 시름을 한결 더는 느낌이었다.

 

고마웠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런 법규를 만들어준 누군가가 고마웠다.

감당 못할 빚에 몰린 이후 나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속에 살았다.

가족을 비롯한 사회의 시선도 책임 못지는 채무자에게는 차갑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채무자를 보호하는 법규를 누군가 만들어줬다는 데 너무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끔찍한 상황을 벗어나면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그런사람이 되자.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다.

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배우 김여진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다.

반값등록금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을 지지한다는 김여진의 1인시위에 대한 기사였다.

반값등록금 문제가 하도 핫이슈여서 나도 무심하게 몇 번 듣긴 했지만, 김여진의 기사는 좀 남다르게 다가왔다.

최고 TOP배우는 아니지만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여배우가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에 관심이 갔다.

그것도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 표명을 꺼려하는 우리나라 연예계 분위기에서 이 정도의 배우가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다는 것이 대단하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김여진의 트위터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김여진이 트위터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트위터에 가입했던 일이 생각났다.

트위터를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로잉’ ‘리트윗’ ‘해시태그를 배우며 소위 트친들을 만들어갔다.

1년이나 걸린다는 파산면책 심사를 견디는 시간 동안 트위터는 그 시간을 견디는 유용한 수단이자 내가 사회를 알고 만나는, 중요한 소통의 매체였다.

 

김여진의 트윗을 읽고 한진중공업김진숙을 알게 되었다.

명동마리제주강정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부당하고 억울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너무도 절박하게 내몰린 죄없는 사람들의 치열한 싸움이 너무 많았다.

그들의 트윗에는 뜬구름 잡는 듯한 얘기는 전혀 없었고 모두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의 정직한 고백들이었다.

찌라시가 범람하는 언론계의 기사들보다 트위터 한 줄을 읽는 것이 현실을 더 깊이있게 배우는 방법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내 삶의 주변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안정했다.

춘천시가 야심차게 밀어 부치는 약사천개발사업의 바람이 우리집 주변에도 몰아 닥쳤다.

주민설명회안내문이 우편으로 날아오고 부동산중개업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몇차례 무산되었던 효일재개발사업도 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긍정적 변화가 아니었다.

절대 장년층과 노년층이 많은데다 2,30년 이상씩 살아온 터줏대감들이 많이 사는 주택가가 우리 동네였다.

대부분의 민심이 주거보장을 하지 않는 이러한 막개발을 탐탁치않게 여기고 있었다.

동네는 많이 뒤숭숭해지는 느낌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또 채무독촉안내 우편물이 계속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이렇게 심란하고 불편한 삶은 나를 더욱 트위터에 열중하게 만들었다.

 

트위터는 억울한 처사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서민들의 고백들이 있었고 그 고백들은 각박한 현실에서 참담함과 무력감을 느끼는 내게 힘겨운 삶을 버티는 용기를 주고 있었다.

말랑말랑한 노래 한 곡을 듣거나 달콤한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위안과 힘을 주고 있었다.

 

이제 파산면책 결정을 얻었다.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삶의 미래도 캄캄하지만 채무의 수렁에서 빠져나왔다.

그래서인가?

그만큼 마음이 간사해져서일까?

이제는 희망버스, 명동마리 소식에 열중하던 때만큼 많은 시간을 트위터에 할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어찌 직장을 구하고 돈을 벌고 생계를 꾸리며 내 가정을 만들지 모르겠다.

그래서 두려움과 절망감, 그리고 외로움에 빠져든다.

TV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인터넷을 배회하지만 내가 꿈 꾸기엔 너무 높아보이는 그네들 삶의 모습들을 보면서 금세 씁쓸해지거나 소외감을 느낀다.

그럴 때 나는 다시 트위터를 찾는다.

거기에 정직한 목소리들이 있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목소리. 억울함에 분노하고 호소하는 목소리. 부정한 세상을 비꼬고 탄식하는 소리. 어렵지만 힘들지만 돕고 격려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엔 TV나 상업적 인터넷 정보들처럼 허황한 설교도 요란한 치장도 거짓된 도덕도 그리고 교묘한 상술도 없다.

듣다보면

그래. 그래. 맞아. 나도 그런 생각해. 나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어

하고 동감하고 열중하게 되는 이웃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나에게 가르쳐준다.

이게 네가 사는 세상이야.’

네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구.’

그리고 내게 질문하다.

그래, 이런 세상에서 너는 어떻게 살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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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매형과 이야기를 하다가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의 행복을 부당하게 짓밟는 권력의 부조리와 탐욕 등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의 혁명과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런 나에게 매형은 인간의 본질적 인성의 문제를 강조하였다. 그러다보니 겨우 서당개 3년에 풍월 읊는 정도의 지식 밖에 없는 내가 맑스철학 얘기를 하게 되었고 매형은 기독교적 입장에 선 인간본성의 한계를 짚고 나왔다. 그때 매형이 내게 물은 것이 "그럼 (사회구조 같은 것의 혁신이나 개혁만 중요하고) 인간에 대한 것-이를테면 개인의 인격적 도덕적 타락, 본성의 문제 등-은 도외시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난 그 대화가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싶었던 내 의도를 매형이 몰라주고 탁상공론식의 철학얘기로 빠지는 것 같아 그만 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질문을 생각해 본다. 

사회의 혁신이나 개혁 더 나아가서는 혁명이 이뤄져 지금보다 더 나아진 사회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100% 완벽한 무결점사회라고 호언장담하지 못하는 이상, 인간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라. 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만 보더라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양상이 다르고 가지각색인데 어떻게 이러한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인간사회의 발전과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

가볍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의 공평한 행복추구권 보장을 꿈꾸었던 맑스에게 내가 받은 이 질문에 대신 대답해 주길 바란다면 그는 어떻게 말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맑스주의 경제학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전반과 인류 역사의 발전을 이야기했던 맑스는 과연 인간 자체에 대한 문제는 빠뜨리고 있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단 출발부터가 다르다. 맑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모든 존재는 물질에 기초하여 존재한다'는 유물론의 입장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맑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철학, 사상 등의 관념적인 것이든)이 물질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철학적 태도로 인간을 바라보면 기독교에서 신의 구원으로 회복되는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가진 정형화된 인간으로 맑스가 말하는 인간론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 맑스는 본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인간(정형화된 인간)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어떤 가치부여나 의미부여가 되지않은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은 물적기반위에서 진화하고 변화 발전해 온 것일 뿐이었다. 그 어떤 대단한 도덕적 인격을 가진 인간(가령, 공자나 석가모니)도 물적 기반을 떠나서 생존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사악한 인격의 인간(나영이사건의 조두순이나 수원토막살인사건의 오원춘)도 그렇게 범죄를 저지르는 데까지 이른 물적기반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틀 안에서 본다면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차별이 존재할 수 없으며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할 평등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가진 문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든 맑스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든 그 부조리와 범죄의 문제를 비판하는데 둘 다 동의하면서도 해법의 입장에 들어가면 한쪽은 인간본성의 문제를 강조하게 되고 다른 한쪽은 사회의 구조적 개혁이나 혁명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회 구조의 혁신, 개혁만 중요하고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도외시하는 것이냐'는 매형의 질문은, 변증법적으로 변화발전하는 물적 세계에서 역시 물적 존재인 인간의 삶을 인정하지 못해서 던져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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