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매형과 이야기를 하다가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의 행복을 부당하게 짓밟는 권력의 부조리와 탐욕 등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의 혁명과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런 나에게 매형은 인간의 본질적 인성의 문제를 강조하였다. 그러다보니 겨우 서당개 3년에 풍월 읊는 정도의 지식 밖에 없는 내가 맑스철학 얘기를 하게 되었고 매형은 기독교적 입장에 선 인간본성의 한계를 짚고 나왔다. 그때 매형이 내게 물은 것이 "그럼 (사회구조 같은 것의 혁신이나 개혁만 중요하고) 인간에 대한 것-이를테면 개인의 인격적 도덕적 타락, 본성의 문제 등-은 도외시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난 그 대화가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싶었던 내 의도를 매형이 몰라주고 탁상공론식의 철학얘기로 빠지는 것 같아 그만 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질문을 생각해 본다. 

사회의 혁신이나 개혁 더 나아가서는 혁명이 이뤄져 지금보다 더 나아진 사회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100% 완벽한 무결점사회라고 호언장담하지 못하는 이상, 인간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라. 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만 보더라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양상이 다르고 가지각색인데 어떻게 이러한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인간사회의 발전과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

가볍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의 공평한 행복추구권 보장을 꿈꾸었던 맑스에게 내가 받은 이 질문에 대신 대답해 주길 바란다면 그는 어떻게 말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맑스주의 경제학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전반과 인류 역사의 발전을 이야기했던 맑스는 과연 인간 자체에 대한 문제는 빠뜨리고 있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단 출발부터가 다르다. 맑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모든 존재는 물질에 기초하여 존재한다'는 유물론의 입장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맑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철학, 사상 등의 관념적인 것이든)이 물질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철학적 태도로 인간을 바라보면 기독교에서 신의 구원으로 회복되는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가진 정형화된 인간으로 맑스가 말하는 인간론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 맑스는 본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인간(정형화된 인간)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다. 어떤 가치부여나 의미부여가 되지않은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은 물적기반위에서 진화하고 변화 발전해 온 것일 뿐이었다. 그 어떤 대단한 도덕적 인격을 가진 인간(가령, 공자나 석가모니)도 물적 기반을 떠나서 생존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사악한 인격의 인간(나영이사건의 조두순이나 수원토막살인사건의 오원춘)도 그렇게 범죄를 저지르는 데까지 이른 물적기반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틀 안에서 본다면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차별이 존재할 수 없으며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할 평등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가진 문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든 맑스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든 그 부조리와 범죄의 문제를 비판하는데 둘 다 동의하면서도 해법의 입장에 들어가면 한쪽은 인간본성의 문제를 강조하게 되고 다른 한쪽은 사회의 구조적 개혁이나 혁명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회 구조의 혁신, 개혁만 중요하고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도외시하는 것이냐'는 매형의 질문은, 변증법적으로 변화발전하는 물적 세계에서 역시 물적 존재인 인간의 삶을 인정하지 못해서 던져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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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람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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