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지젝이 천리를 간다

슬라보예 지젝이 지난 일요일에,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령 시위'에 나와서 연설을 했다. 동료와 그 이야기를 하다가, 연설문을 옮겨보고 싶어졌다.

동영상도 아주 인상적이다. 지젝의 무대 매너(?)도 그렇고, 연설 방식도 그렇다. 전체 연설은 20분 정도이고 이 유튜브 영상은 뒤가 조금 잘린 15분 정도다. 원래는 그 절반 시간이면 충분했을 텐데, 마이크가 없어서 주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반복하며 스피커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시간이 두 배로 걸렸다. 세계적인 학자가 세계의 눈길을 모으는 시위에 나와 연설을 하는데, 그의 주변에 21세기형 스마트폰과 카메라는 숱하게 많지만 17세기에 그 아이디어가 나온 이래 전통적인 '시위 용품'이 되어 온 그 흔한 메거폰 하나 없어서 주변 청중이 그의 말을 구절 구절 반복 재생한다. 이것은 뉴욕시 당국이 메거폰을 비롯한 확성 장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코티 공원에서 누가 연설을 하든, 연설은 이런 원시적인 (혹은 80년대식) 방식으로만 증폭된다. 그의 주장은 바로 그가 서 있는 작은 공간을 넘어서 전달되기도 어려운 양상이다.
그러나 한편, 스마트폰과 카메라에 기록된 덕분에 그의 주장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무한히 확장되고, 나와 당신이 이렇게 보고 있다. 비조직성 같은 이번 시위의 특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인데, 지젝의 연설을 비롯해 주코티에서 주장이 탄생하고 확장하는 과정은 그 상징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연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루저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루저들은 저곳 월 스트리트에 있다. 우리가 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밤낮으로 몇 주 동안 사유재산을 파괴한다 해도, 2008년의 금융 시장 붕괴 당시 파괴된 사유재산의 양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피땀 흘려 이룬 그 사유재산 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꿈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다. 정작 백일몽을 꾸는 이들은 지금과 같은 방식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으리라 믿는 그들 자신이다.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점점 악몽이 되고 있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스템이 그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 보는 목격자일 뿐이다. 마치 만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고양이가 낭떠러지를 향해 다가간다. 끝을 지나서 디딜 땅이 없어졌는데도, 고양이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계속 걸음을 걷는다. 아래를 쳐다보며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고양이는 이미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일을 하는 중이다. 우리는 월 스트리트 사람에게 "아래를 쳐다보라구!" 하고 말하는 중이다.
2011년 4월 중순에 중국 정부는 대안 현실이나 시간 여행을 포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소설 등을 모두 금지시켰다. 이런 조처는 중국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여전히 대안을 꿈꾸고 있으므로, 이런 꿈꾸기를 금지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곳의 우리에게는 그런 금지 조처가 필요없다. 우리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우리가 꿈꿀 여지조차 주지 않고 우리를 옥죄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들을 생각해 보라. 세상이 종말로 향하는 스토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소행성이 지구에 부딪쳐 모든 생물이 멸종하게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공산주의 시절에 나돌던 구닥다리지만 매력적인 농담이 하나 있다. 한 동독 인민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일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우편물이 검열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두었다. "암호를 정해 두세나. 만일 내가 파란색 잉크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건 내가 쓴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일세. 만일 빨간색 잉크로 씌어 있다면, 편지 내용은 거짓일세." 그가 떠난 지 한 달 뒤에, 그의 친구는 시베리아에서 온 첫 편지를 받았다. 파란색으로만 쓰인 편지였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굉장하다네. 상점은 질 좋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고, 극장에서는 서방에서 만든 유명한 영화가 상영되지. 아파트는 널찍하고 고급스럽다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빨간색 잉크뿐이라네."
바로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빨간 잉크가 없다. 우리가 갖지 못한 자유를 드러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도록 교육 받는다. 이를테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강조되는 자유라든가 말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자유의 개념을 왜곡시킨다. 우리에게 필요한 빨간색 잉크를 만들어 내는 것.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바로 그것이다.
조심해야 할 점도 있다. 여러분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여기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축제란 원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축제가 끝난 다음날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 뒤가 문제인 것이다. 그 때 어떤 변화가 생길까? 시간이 지난 뒤 당신은 오늘을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 우리는 젊었었고, 시위는 대단했지." 나는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대안을 생각할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닌가.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전히 실현 가능한 최선의 사회가 아닌 것이다. 우리 앞에는 긴 여정이 남아 있다. 우리가 맞서야 할 문제들은 진정으로 어려운 것들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회 체계가 자본주의를 대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따라야 하는가?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당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시스템이다. 또 적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물타기하러 나선 가짜 친구들에 대해서도 주의하라. 이들은 이 시위가 아무런 해가 없는 도덕적 항의에 그치도록 만들기 위해 애쓸 것이다.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 무알콜 맥주, 무지방 아이스크림처럼. 그들의 노력은 커피에서 카페인을 빼내려는 것이나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가 무엇인가. 깡통을 재활용하는 일, 자선 사업에 푼돈을 기부하는 일,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사면서 1%가 제3 세계 기아 아동을 돕는 데 쓰이도록 하는 일 등을 하면서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기에는 이 세상의 문제가 너무 크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일도 아웃소싱되고 포로에 대한 고문도 아웃소싱되는 세상이다. 결혼 알선 업체들은 우리의 사랑마저 아웃소싱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 참여 또한 아웃소싱되도록 허용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이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만일 공산주의란 말이 1990년에 무너진 시스템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오늘날 가장 효율적이고도 무자비한 자본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오늘날 중국의 자본주의는 미국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지만,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당신이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이를 반민주주의적이라고 매도하는 협박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변화는 실현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원고로 준비한 연설이고, 아래는 원고 없이 직접 말한 내용이다.)
오늘날 실현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미디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기술적인 면과 성적인 면에서 안 되는 일이란 없는 곳이 된 듯하다. 달로 여행할 수 있으며, 유전자 공학 덕분으로 영생에 가깝게 되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동물을 비롯한 그 무엇과도 섹스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나 경제 분야를 보라. 이 분야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부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약간 올리고 싶다고 해 보자.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경쟁력을 잃는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당신이 의료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돈이 좀더 필요하다고 해 보자.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가 되자는 말이냐.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곧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도 당장의 의료 혜택을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 지출도 허용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은 무언가 잘못된 곳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the commons를 염려한다는 점이다. 자연의 commons,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commons, 유전자 공학의 commons. 우리는 이를 위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것만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
공산주의는 분명히 실패했지만, commons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여기 모인 우리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깨달아야 할 게 하나 있다. 기독이란 무엇인가? 성령이다. 성령이란 무엇인가? 자유와 책임을 가진 신자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된 평등적인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임한 곳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저 건너편 월 스트리트에는 신성을 모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견인불발의 마음가짐뿐이다. 내가 염려하는 유일한 점은, 우리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간 뒤,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 때 우리 정말 대단했지" 하고 추억에 젖어 회상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여러분 자신에게 약속하라.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욕망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욕망하는 것을 실제로 추구하기를 두려워 말라.

the commons는 communism과 연결되며 쓰였는데, 뒤에서 사용되는 문맥까지 고려하면 한국어로 옮기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두었다. 사전적으로는 서민이란 뜻이 있고, 여기서는 그러한 계층이 구성원이 되는 공동체 정도로 이해해도 괜찮을 듯 싶다. 아니면 추상적인 공(共, 더불어)의 개념으로 볼 수도 있을 듯. 지젝이 이 말을 다른 의미로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덧붙임] 지젝이 연설에서 말한 'the commons'의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관련 자료는 <New Left Review> 2009년 5/6월호(43-55)에 실은 그의 에세이 'How to Begin from the Beginning'인 듯하다. 이 에세이 뒷부분에, 연설에서 나온 거의 그대로의 형태와 의미로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식 인식을 비판하며, 세계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재생산을 부정할 만큼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는 네 가지 가능한 모순을 제시하는데, 1) 생태적 재앙의 위협, 2) 이른바 지적 재산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부적절한 사유화, 3) 새로운 과학 기술(특히 유전자 공학) 발전에 따른 사회윤리적 문제, 4) 새로운 형태의 사회 격차와 차별 등이다. 연설에 나온 "자연의 commons,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commons, 유전자 공학의 commons"는 이 1)~3)과 정확히 대응한다. 그리고 그 아래 이 commons들을 개별 설명하는데,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강조는 내가).
First, there are the commons of culture, the immediately socialized forms of cognitive capital: primarily language, our means of communication and education, but also shared infrastructure such as public transport, electricity, post, etc. If Bill Gates were allowed a monopoly, we would have reached the absurd situation in which a private individual would have owned the software tissue of our basic network of communication. Second, there are the commons of external nature, threatened by pollution and exploitation—from oil to forests and the natural habitat itself—and, third, the commons of internal nature, the biogenetic inheritance of humanity. What all of these struggles share is an awareness of the destructive potential—up to the self-annihilation of humanity itself—in allowing the capitalist logic of enclosing these commons a free run. It is this reference to ‘commons’ which allows the resuscitation of the notion of communism: it enables us to see their progressive enclosure as a process of proletarianization of those who are thereby excluded from their own substance; a process that also points towards exploitation. The task today is to renew the political economy of exploitation—for instance, that of anonymous ‘knowledge workers’ by their companies.아래 댓글에서 의견을 주신 분들의 해석들과 다 잘 맞는다. commons를 어떤 말로 옮기든,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개 잘 이해하셨으리라 믿는다.
※ 이미지: imposemagazine.com

Commented by deulpul at 2011/10/16 12:09

 

[출처: 강금실의 서재]

Posted by 사람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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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민 여러분, 여러분께 희망의 투표를 기대합니다!!!

10월 26일에 민주시민의 기본권리, 꼭 행사해 주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개인의 인간됨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총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삶을 한번 비교해봤습니다.

한번 평가해보시길.

[출처: 다음 아고라- 크루즈님의 같은 제목의 글]

Posted by 사람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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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꽃들은 죽겠지

시(詩) 2011. 10. 10. 14:40

예쁜 꽃들은 죽겠지

 

예쁜 꽃들은 죽겠지.

장미꽃만 남은 쓰레기 같은 세상.

꽃들에게 지들 향기를 버리고 장미를 닮으라 한다.

장미처럼 검붉지 않고

장미처럼 가시가 없는 꽃은 죽으라 한다.

허나 지 예쁜 꽃잎을 떨구고

지 고운 줄기에 가시를 달아도

너는 장미가 아니라 내쫓아버린다.

그냥 그대로 죽으라 한다.

그러니 이제 예쁜 꽃들은 죽겠지.

그 어여쁜 꽃잎과 그 고운 향기는 사라져

그 눈부신 자태들은 하나둘

먼지처럼 스러져 갈테지.

하여 머잖아 예쁜꽃들은 하나도 못보게 다 죽겠지.

세상이 온통 가시 돋힌 장미로 가득하여

냄새나고 역겹게 시들어 가겠지.

젠장할...

젠장할...

바보같은 사람들...

병신같은 사람들...

                                         (2011. 10. 9.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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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람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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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심리

시(詩) 2011. 10. 10. 14:34

피해심리

 

뒤란에서 커다란 크레인 하나를 발견하고 겁이 덜컥난다.

동네에서 얼쩡대는 새빨간 크레인 녀석.

이 가난한 동네에 뭐 주워먹을 게 있어서 이렇게 어슬렁 거리나?

또 허허로운 세상소식처럼 이 허름한 동네에도

개발의 바람이 부는건가?

덜그락 쿵쾅, 덜그락 쿵쾅.

이웃집 개축공사에도 요란한 진동과 소음으로 지치는

돈없고 힘없는 가난한 집인것을...

있는 놈들은 또 무슨 꼼수를 부려

없는 사람 등짝을 후려칠 흉계를 꾸미려는 걸까?

씁쓸하고 두려운 마음만

굶주린 뱃속을 쓰리게 한다.

                                                                      (2011. 10. 9.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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