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2번의 주민설명회를 간 적이 있다.

귀가 어두우신 80대 아버지를 대신해서 참석했다. (70대 어머닌 그때 병원에 입원중이셨던 것 갈다.)

집을 사본 적도 없고 부동산이라든가 이런 쪽에 거의 어두운 상황이었지만,

동네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는 재개발사업 분위기에서  그래도 피해 안보고 우리집을 지킬 수 있는

정보 하나라도 있으면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갔다.

 

첫번 주민설명회는 별다른 게 없었던 것 같다.

주민들의 상당한 참석에도 불구하고 설명회를 개최한 춘천시에서 내놓은 내용은

"약사재정비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법령(그것을 정확히 법령이라고 부르는지, 아니면 시 조례라든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이 통과됐다'는 게 전부였다.

개발을 위해 시가 주민들에게 보장해주거나 대책 마련을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정비사업은 시가 알아서 추진할테니 신경쓸 일이 아니고 주택개발은 민간개발하는 것이니 주민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낡고 오래된 집들이 많아서 개발의 필요성을 주민들이 느끼고는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환경이 시의 책임있는 태도와 보장아래 다른동네들(석사동, 퇴계동, 온의동)처럼

개선되길 바라는 것이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업의 이름으로 동네 아무데나 함부로 길을 깎거나 내버리고 나몰라라하는 식으로 끝나버리는 개발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게다가 동네 일부에서 만들었던 '효일조합'이란 이름의 민간재개발이 최근까지도 공사를 못하고 계속 말썽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온 주민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두번째 주민설명회 안내문을 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신용주(?)'라고 밝힌 시청 도시정비과장이 설명을 맡았다.

 

내용은 딱 2가지였다.

1) 첫번 주민설명회에서,

민간개발방식의 주택개발사업을 '도시개발법'인가 하는 방식으로 바꿔 주택재개발사업을 벌이겠다는 것.

(사실, 행정상의 차이일 뿐 주민들에게 무슨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음.)

2) 8지구 약사재정비 사업의 구체적 사업 시행계획을 설명하겠다는 것.

 

 

듣고나서

이런 쪽에 아는 바도 없고 설명회랍시고 떠드는 법령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다 갈 수는 없다 싶어서 논리적으로 몇가지를 짚어 물었다.

 

그 중 기억 나는 것이

1.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주거용 부동산이지 재테크의 부동산이 아닙니다.

몇 푼 쥐어주는 식의 보상방식이 아니라 이주대책을 보장하는 보상방식은 마련되어 있지 않나요?

▶ 답변: LH공사와 분양계약을 통해 이주대책 보장방식을 계획했지만 LH공사의 분양계획차질로 어렵습니다.

2. 사업예산이 안내문에 800억이라고 나와있습니다.

보상가 감정도 안나온 상황에서 어떻게 사업예산 규모가 나올 수 있나요?

(몇 푼 쥐어주고 쫓아내겠다는 계획이 들어있는 건 아닌가요?)

▶답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희 자료에 따른 대략적인 산출규모입니다.

3. 주민 의견을 묻겠다고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물을 건가요? (방문/설문조사)

▶답변: 추후에 최선의 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4. (여러 사람의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그러면 이렇게 여쭤볼게요.

주민이 반대하면 폐기될 수도 있는 사업입니까?

▶답변: 8지구의 춘천시 소유지분이 51%입니다.  지금 춘천시가 주민  동의 없이 시행해도 하자없는 사업입니다.

다만, 저희 시가 절차상 주민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서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업을 하겠다고 추진했다가 포기하면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폐기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함.)

 

질문한 답변중에 내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주는 그 어떤 약속이나 보장도 들어있지 않았다.

Posted by 사람23호
,

12월이었던 것 같다.

▲ 춘천시장 이광준 씨

강원도와 도교육청이 재정의 80%를 지원하는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을, 춘천시가 강원도 18개 시군 중에서 유일하게 거부하고 나섰다는 기사를 보았다.

관련기사>

[강원도민일보] 무상급식 거부 반발 확산

[강원도민일보] 춘천시·시의회 무상급식 공방가열

[한겨레신문] 춘천시 무상급식 거부에 결국… “학부모 힘으로 예산 17억 마련”

[한겨레신문] 춘천시, 무상급식 거부해놓고… 교육청 매칭예산 60억은 달라?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동네 주민자치센터(동사무소) 복지담당을 만나 복지상담을 받으면서 구차한 하소연을 어렵게 털어놓은 끝에 고작 짤막하고 무성의한 답변 몇 마디를 들어야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강원도의 무상급식지원 정책은  초등학생도 아니고 자녀도 없는 나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일은 아니지만 기뻐하고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굳이 이런 경험이 아니었더라도 상식적으로만 생각해 봐도 우리의 공교육 환경이 얼마나 윤택해지는 좋은 일인가?

그런데 춘천시는 이것을 거부하고 반대하였다. 왜?

신문기사를 통해 춘천시의 입장이란 것을 살펴보면

(춘천시가 여러가지 거부논리를 내세우지만 많은 부분들은 전면무상급식 지지측과 진실공방에 가까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춘천시가 전면무상급식을 거부하며 내세우는 가장 효과적인 명분은

빠듯한 시 예산에서 '전면무상급식'에 돈을 쓰느니  '노인 일자리 창출'에 돈을 쓰겠다는 것이다.

춘천시민을 위해, 없는 복지예산을 잘 쪼개서 쓰려고 고민하는 중인데 이번엔 전면무상급식 재원까지 마련해야 되느냐 하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명분에 춘천시가 얼마나 순수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을까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춘천시 효자 1동'이라는 동네 상황 때문이다.

효자 1동은  춘천시 외곽의 면단위 지역보다도 인구수가 적고 노령인구가 많은 동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춘천시가 현재 '약사재정비사업'이라는 것을 벌이고 있는데,

'노인일자리창출' 복지예산 운운하는 춘천시가 이 힘없고 노령인구 많은 동네 주민들을

무조건 동네 바깥으로 몰아내는 식의 개발사업을 밀어부치는 인상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춘천시청 홈페이지 첫화면 (2012. 1. 20)

▲ 약사재정비사업 안내문 (시청 홈페이지, 2012. 1. 20)

시청홈페이지를 접속하면 재정비사업에 대한 안내광고를 볼 수 있지만 주민설명회에 참석하면서 내가 대략적으로 이해한 사업의 요지는

이런 게 아닌가 싶다.

1) 서울간 복선전철화하면서 예상되는 교통량을 고려하여 연계 도로를 확장, 확충 하는 등의 정비사업을 한다.

2) 동시에 재정비 도로 근처 주택가에 주택재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3) 이러한 구상에 따라 대상지역을 9개지구로 나누어 사업을 벌인다.

그리고 이런 계획하에 우리 동네는 "약사재정비사업" 8지구 대상지역이 되었다.

 

그런데 내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사업인가?" "정말 주민들에게 유익한 사업인가?"

Posted by 사람23호
,

발 없는 지젝이 천리를 간다

슬라보예 지젝이 지난 일요일에,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령 시위'에 나와서 연설을 했다. 동료와 그 이야기를 하다가, 연설문을 옮겨보고 싶어졌다.

동영상도 아주 인상적이다. 지젝의 무대 매너(?)도 그렇고, 연설 방식도 그렇다. 전체 연설은 20분 정도이고 이 유튜브 영상은 뒤가 조금 잘린 15분 정도다. 원래는 그 절반 시간이면 충분했을 텐데, 마이크가 없어서 주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반복하며 스피커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시간이 두 배로 걸렸다. 세계적인 학자가 세계의 눈길을 모으는 시위에 나와 연설을 하는데, 그의 주변에 21세기형 스마트폰과 카메라는 숱하게 많지만 17세기에 그 아이디어가 나온 이래 전통적인 '시위 용품'이 되어 온 그 흔한 메거폰 하나 없어서 주변 청중이 그의 말을 구절 구절 반복 재생한다. 이것은 뉴욕시 당국이 메거폰을 비롯한 확성 장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코티 공원에서 누가 연설을 하든, 연설은 이런 원시적인 (혹은 80년대식) 방식으로만 증폭된다. 그의 주장은 바로 그가 서 있는 작은 공간을 넘어서 전달되기도 어려운 양상이다.
그러나 한편, 스마트폰과 카메라에 기록된 덕분에 그의 주장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무한히 확장되고, 나와 당신이 이렇게 보고 있다. 비조직성 같은 이번 시위의 특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인데, 지젝의 연설을 비롯해 주코티에서 주장이 탄생하고 확장하는 과정은 그 상징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연설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루저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루저들은 저곳 월 스트리트에 있다. 우리가 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밤낮으로 몇 주 동안 사유재산을 파괴한다 해도, 2008년의 금융 시장 붕괴 당시 파괴된 사유재산의 양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피땀 흘려 이룬 그 사유재산 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꿈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다. 정작 백일몽을 꾸는 이들은 지금과 같은 방식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으리라 믿는 그들 자신이다.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점점 악몽이 되고 있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스템이 그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 보는 목격자일 뿐이다. 마치 만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고양이가 낭떠러지를 향해 다가간다. 끝을 지나서 디딜 땅이 없어졌는데도, 고양이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계속 걸음을 걷는다. 아래를 쳐다보며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고양이는 이미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일을 하는 중이다. 우리는 월 스트리트 사람에게 "아래를 쳐다보라구!" 하고 말하는 중이다.
2011년 4월 중순에 중국 정부는 대안 현실이나 시간 여행을 포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소설 등을 모두 금지시켰다. 이런 조처는 중국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여전히 대안을 꿈꾸고 있으므로, 이런 꿈꾸기를 금지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곳의 우리에게는 그런 금지 조처가 필요없다. 우리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우리가 꿈꿀 여지조차 주지 않고 우리를 옥죄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들을 생각해 보라. 세상이 종말로 향하는 스토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소행성이 지구에 부딪쳐 모든 생물이 멸종하게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공산주의 시절에 나돌던 구닥다리지만 매력적인 농담이 하나 있다. 한 동독 인민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일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우편물이 검열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두었다. "암호를 정해 두세나. 만일 내가 파란색 잉크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건 내가 쓴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일세. 만일 빨간색 잉크로 씌어 있다면, 편지 내용은 거짓일세." 그가 떠난 지 한 달 뒤에, 그의 친구는 시베리아에서 온 첫 편지를 받았다. 파란색으로만 쓰인 편지였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굉장하다네. 상점은 질 좋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고, 극장에서는 서방에서 만든 유명한 영화가 상영되지. 아파트는 널찍하고 고급스럽다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빨간색 잉크뿐이라네."
바로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빨간 잉크가 없다. 우리가 갖지 못한 자유를 드러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도록 교육 받는다. 이를테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강조되는 자유라든가 말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자유의 개념을 왜곡시킨다. 우리에게 필요한 빨간색 잉크를 만들어 내는 것.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바로 그것이다.
조심해야 할 점도 있다. 여러분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여기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축제란 원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축제가 끝난 다음날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 뒤가 문제인 것이다. 그 때 어떤 변화가 생길까? 시간이 지난 뒤 당신은 오늘을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 우리는 젊었었고, 시위는 대단했지." 나는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대안을 생각할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닌가.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전히 실현 가능한 최선의 사회가 아닌 것이다. 우리 앞에는 긴 여정이 남아 있다. 우리가 맞서야 할 문제들은 진정으로 어려운 것들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회 체계가 자본주의를 대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따라야 하는가?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당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시스템이다. 또 적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물타기하러 나선 가짜 친구들에 대해서도 주의하라. 이들은 이 시위가 아무런 해가 없는 도덕적 항의에 그치도록 만들기 위해 애쓸 것이다.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 무알콜 맥주, 무지방 아이스크림처럼. 그들의 노력은 커피에서 카페인을 빼내려는 것이나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가 무엇인가. 깡통을 재활용하는 일, 자선 사업에 푼돈을 기부하는 일,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사면서 1%가 제3 세계 기아 아동을 돕는 데 쓰이도록 하는 일 등을 하면서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기에는 이 세상의 문제가 너무 크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일도 아웃소싱되고 포로에 대한 고문도 아웃소싱되는 세상이다. 결혼 알선 업체들은 우리의 사랑마저 아웃소싱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 참여 또한 아웃소싱되도록 허용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이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만일 공산주의란 말이 1990년에 무너진 시스템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오늘날 가장 효율적이고도 무자비한 자본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오늘날 중국의 자본주의는 미국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지만,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당신이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이를 반민주주의적이라고 매도하는 협박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변화는 실현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원고로 준비한 연설이고, 아래는 원고 없이 직접 말한 내용이다.)
오늘날 실현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미디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기술적인 면과 성적인 면에서 안 되는 일이란 없는 곳이 된 듯하다. 달로 여행할 수 있으며, 유전자 공학 덕분으로 영생에 가깝게 되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동물을 비롯한 그 무엇과도 섹스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나 경제 분야를 보라. 이 분야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부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약간 올리고 싶다고 해 보자.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경쟁력을 잃는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당신이 의료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돈이 좀더 필요하다고 해 보자.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가 되자는 말이냐.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곧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도 당장의 의료 혜택을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 지출도 허용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은 무언가 잘못된 곳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the commons를 염려한다는 점이다. 자연의 commons,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commons, 유전자 공학의 commons. 우리는 이를 위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것만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
공산주의는 분명히 실패했지만, commons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여기 모인 우리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깨달아야 할 게 하나 있다. 기독이란 무엇인가? 성령이다. 성령이란 무엇인가? 자유와 책임을 가진 신자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된 평등적인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임한 곳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저 건너편 월 스트리트에는 신성을 모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견인불발의 마음가짐뿐이다. 내가 염려하는 유일한 점은, 우리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간 뒤,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 때 우리 정말 대단했지" 하고 추억에 젖어 회상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여러분 자신에게 약속하라.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욕망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욕망하는 것을 실제로 추구하기를 두려워 말라.

the commons는 communism과 연결되며 쓰였는데, 뒤에서 사용되는 문맥까지 고려하면 한국어로 옮기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두었다. 사전적으로는 서민이란 뜻이 있고, 여기서는 그러한 계층이 구성원이 되는 공동체 정도로 이해해도 괜찮을 듯 싶다. 아니면 추상적인 공(共, 더불어)의 개념으로 볼 수도 있을 듯. 지젝이 이 말을 다른 의미로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덧붙임] 지젝이 연설에서 말한 'the commons'의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관련 자료는 <New Left Review> 2009년 5/6월호(43-55)에 실은 그의 에세이 'How to Begin from the Beginning'인 듯하다. 이 에세이 뒷부분에, 연설에서 나온 거의 그대로의 형태와 의미로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식 인식을 비판하며, 세계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재생산을 부정할 만큼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는 네 가지 가능한 모순을 제시하는데, 1) 생태적 재앙의 위협, 2) 이른바 지적 재산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부적절한 사유화, 3) 새로운 과학 기술(특히 유전자 공학) 발전에 따른 사회윤리적 문제, 4) 새로운 형태의 사회 격차와 차별 등이다. 연설에 나온 "자연의 commons,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commons, 유전자 공학의 commons"는 이 1)~3)과 정확히 대응한다. 그리고 그 아래 이 commons들을 개별 설명하는데,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강조는 내가).
First, there are the commons of culture, the immediately socialized forms of cognitive capital: primarily language, our means of communication and education, but also shared infrastructure such as public transport, electricity, post, etc. If Bill Gates were allowed a monopoly, we would have reached the absurd situation in which a private individual would have owned the software tissue of our basic network of communication. Second, there are the commons of external nature, threatened by pollution and exploitation—from oil to forests and the natural habitat itself—and, third, the commons of internal nature, the biogenetic inheritance of humanity. What all of these struggles share is an awareness of the destructive potential—up to the self-annihilation of humanity itself—in allowing the capitalist logic of enclosing these commons a free run. It is this reference to ‘commons’ which allows the resuscitation of the notion of communism: it enables us to see their progressive enclosure as a process of proletarianization of those who are thereby excluded from their own substance; a process that also points towards exploitation. The task today is to renew the political economy of exploitation—for instance, that of anonymous ‘knowledge workers’ by their companies.아래 댓글에서 의견을 주신 분들의 해석들과 다 잘 맞는다. commons를 어떤 말로 옮기든,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대개 잘 이해하셨으리라 믿는다.
※ 이미지: imposemagazine.com

Commented by deulpul at 2011/10/16 12:09

 

[출처: 강금실의 서재]

Posted by 사람23호
,